독서모임 한 번이
서비스로 번진 이야기
모든 일의 시작은 매주 토요일 아침의 독서모임이었다.
2019년 가을, "Radical Markets(래디컬 마켓)" 독해모임이 있었다. 30~40명이 참석했던 이 모임에서, 좋은 책을 같이 읽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 "정당들이 내놓은 공약, 실제로 읽어본 적 있어?"라는 질문을 공유하게 됐다. 중앙선관위에 제출된 10대 공약 문서는 공개돼 있었지만, 150페이지가 넘는 PDF를 뒤적이는 유권자는 거의 없었다.
독서모임 구성원들은 이렇게 정리했다 — "읽기 어려운 공약지를 접근성 높여 일반인에게 보여주자." 코로나19가 겹쳐 모임 대부분이 온라인으로 전환된 상황에서도, 한 번도 같이 일해본 적 없는 사람들이 단기간에 서비스를 출시했다.
"회사 밖에서, 회사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들과 만나 프로젝트를 하는 건 처음이었다. 회사 일이 너무 재미 없어서 '어디 재밌는 일 없는지,' 눈에 불을 살짝 키고 있었던 차였다." — 숨 (기록 담당)
여덟 명, 서로 처음 본 사이
콘텐츠 기획 3명, 개발 2명, UX 기획 1명, 마케팅 1명, 디자인 1명. 전원 본업이 따로 있는 사이드 프로젝트.
기록 담당 숨이 팀 후기까지 정리했다. 대부분의 미팅은 온라인이었고, 최종 프로덕트가 나온 후에야 처음 대면한 멤버도 있었다.
"한 명 한 명이 본인 몫을 10인분씩 해주셔서 잘 돌아갈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뭐가 됐건 한 번 해보자 라는 생각으로 무언가를 처음부터 끝까지 끝내본 게 얼마만인지." — 윌리
공약쥬스 — VAA를 쥬스로
Voting Advice Application(선거조언앱)을 M-Z세대용 쥬스 추천 서비스로 재해석했다.
밀레니얼-Z세대(1980년생 ~ 2002.04.16 이전 출생)가 이용자에게 21개의 쥬스 중 하나가 결과로 떠진다. 정당별 '쎈 맛'과 '순한 맛' 2종씩 18개 + 진보·보수·중도 '혼합 쥬스' 3종.
대상 정당 9개
연합·위성정당(미래한국당, 더불어시민당, 열린우리당)은 분석에서 제외 — 본당 공약과 겹치거나 10대 공약 미제출.
19개 주제
빅카인즈, 구글 트렌드, SBS뉴스, 비디오머그, 허핑턴포스트, 뉴닉에서 지난 3년간 가장 많이 조회된 뉴스 키워드를 뽑고, 그 키워드에 대응되는 공약을 3개 이상 정당이 낸 주제만 살렸다.
추천 알고리즘
사용자가 고른 공약 중 특정 정당이 과반 이상이면 그 정당의 '쎈 맛', 과반은 아니지만 최다면 '순한 맛', 단독 1위가 없으면 선택 공약의 정치성향을 계산해 진보계 '트로피컬페스티벌', 보수계 '베리익스트림시에스타', 중도계 '매지컬후르츠블렌드' 중 하나를 내보냈다.
3개월 동안 부은 리소스
회의는 Zoom, 협업은 비동기, 주말은 언제나 공약쥬스.
들어간 리소스 (대략)
- 기간: 2020년 1월 ~ 4월 초 (약 3개월 집중)
- 인력: 8명 × 사이드 프로젝트 → 실질 40+ man-weeks 추정
- 콘텐츠 노동: 9개 정당 × 10대 공약 총 150여 페이지 원문을 19개 주제별로 재분류 · 재기술. 표제어는 50자 이내, 상세는 100자 이내로 전부 수작업 리라이팅.
- 제약: 코로나로 거의 모든 미팅 온라인화. 일부 멤버는 서비스 출시 이후에야 처음 대면.
- 비용: 회계장부가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자체 지출(도메인·호스팅·디자인 툴 등) 중심. 외부 자금 의존 최소화.
의외로 어려웠던 것
정당 간 공약 개수 차이가 최대 3배까지 났다 — 정의당 19개 vs 민생당 7개. 19개 주제에 해당하는 공약이 있는 정당은 많이 실렸고, 없는 정당은 적게 실렸다. "단순 문제 진술에 그친 공약"과 "구체적 이행방안이 있는 공약"을 같은 취급하지 않으려 표제어 문구를 수없이 고쳤다.
"쌈에게는 직접 물었던 기억이 있다. 독서 모임으로부터 공약쥬스는 탄생했다고."
"선거일 직전 며칠간 트래픽이 급속히 증가했을 때 모두 기분이 붕 뜨며 고생 일부를 보상받았었죠." — 쌈
150페이지 원문을
50자로 갈아넣는 일
공약쥬스에서 가장 많은 시간이 들어간 곳은 개발도, 디자인도 아니었다. 콘텐츠였다.
1단계: 원문 수집 — 9개 정당 × 10대 공약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제출된 정당별 10대 공약 문서를 전부 내려받았다. 각 정당의 공약집은 형식도 분량도 제각각이었다. 어떤 정당은 A4 20페이지에 구체적 이행 로드맵까지 달았고, 어떤 정당은 5페이지짜리 슬로건 나열이었다. 이 원문을 총 150여 페이지 분량으로 모았다.
2단계: 주제 선정 — 뉴스 키워드에서 19개로
원문을 그대로 보여줄 수 없었다. 서비스의 핵심은 "정당 간 비교"인데, 각 정당이 다루는 주제도 깊이도 달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먼저 주제 축을 만들었다.
키워드 추출 소스 (1차)
- 빅카인즈 — 한국언론진흥재단 뉴스 빅데이터 분석 시스템
- 구글 트렌드 — 지난 3년간 한국 검색량 추이
- SBS뉴스, 비디오머그, 허핑턴포스트, 뉴닉 — M-Z세대가 실제로 소비하는 매체
3년간 가장 많이 조회된 뉴스 키워드를 뽑고, 그 키워드에 대응하는 공약을 3개 이상 정당이 제시한 것만 살렸다. 결과: 19개 주제. 여기서 이미 "기후위기"라는 단독 주제는 빠졌다 — 뉴스 키워드로는 "에너지"와 "미세먼지"로만 잡혔기 때문이다.
3단계: 공약 재기술 — 이게 진짜 노동이었다
선정된 19개 주제에 맞춰 각 정당의 관련 공약을 원문에서 추출한 뒤, 정당 간 비교가 가능하도록 구체적 이행방안 수준에서 다시 썼다. 단순 문제 진술("미세먼지를 줄이겠다")이 아니라 실제 정책 방향이 드러나도록.
리라이팅 제약 조건
| 항목 | 제약 | 이유 |
|---|---|---|
| 표제어(타이틀) | 50자 이내 | 모바일 화면에서 한 줄 표시, 주제당 공약지 최대 8개 가정 → 스크롤 최소화 |
| 상세 내용 | 100자 이내 | 별도 클릭해서 펼치는 영역. 공약쥬스 평균 이용시간(5분 19초) 고려 |
| 어조 | 원문 그대로 인용 | 팀이 의견을 넣지 않기로 함. 쟁점이 있는 표현("우한 코로나" 등)도 정당 원문 그대로 사용 |
이 과정에서 가장 어려웠던 건 동일 주제인데 정당마다 깊이와 폭이 다른 경우였다. 예를 들어 "에너지" 주제에서:
- 정의당 — "석탄 발전을 친환경 발전으로 모두 대체하기" (구체적 목표)
- 민생당 — "화석연료 기반에너지 50% 감축하기" (수치 제시)
- 미래통합당 — "탈원전 정책 취소하고 원자력 산업 육성하기" (방향 정반대)
- 친박신당 — "탈원전 정책 폐기하고 태양광 발전소 해체" (가장 강경)
이 네 가지를 "에너지"라는 같은 주제 아래 병렬 배치하되, 어느 쪽이 더 좋다는 뉘앙스 없이 50자 안에 차이점이 드러나게 써야 했다. 콘텐츠팀 3명(쌈, 윌리, 키)이 이 작업에 가장 많은 시간을 쏟았다.
4단계: 정당별 공약지 수 불균형 문제
주제 선정 후 각 정당의 최종 공약지 개수가 결정됐는데, 편차가 컸다:
차이의 원인은 단순했다 — 밀레니얼 세대가 관심 있는 19개 주제에 해당하는 공약이 많은 정당은 많이 실렸고, 적은 정당은 적게 실렸다. 서비스에서 공약이 많이 노출되는 정당이 유리해지는 구조적 편향이 생길 수 있었지만, 팀은 "없는 공약을 만들어낼 수는 없다"고 판단하고 그대로 갔다.
5단계: 표현의 무게 — 나중에서야 깨달은 것
서비스 운영이 끝난 뒤 데이터를 분석하면서 충격적인 사실을 발견했다. 비슷한 내용인데 표현만 다른 공약들의 득표 차이가 수배에 달했다.
| 약한 표현 (더 많은 표) | 강한 표현 (더 적은 표) | 차이 |
|---|---|---|
| "편향된 정치세력으로부터 우리 아이 보호" 미래통합당 5,483표 | "전교조의 좌익 사상교육 금지" 우리공화당 4,074표 | +1,409 |
| "비동의 강간죄 개정, 성폭력 공소시효 폐지" 녹색당 46,242표 | "비동의 강간죄 빠르게 개정하기" 정의당 22,428표 | 2배+ |
| "석탄 발전 빠르게 줄이고 친환경 발전 늘리기" 더불어민주당 5,372표 | "석탄발전을 친환경 발전으로 모두 대체" 정의당 1,889표 | 2.8배 |
| "탈원전 정책 재검토하고 차세대 원전 개발" 국민의당 5,892표 | "탈원전 정책 폐기하고 태양광 발전소 해체" 친박신당 1,546표 | 3.8배 |
50자 안에 어떤 단어를 넣느냐가 수천 표를 갈랐다. "모두", "폐기", "해체", "금지" 같은 절대적 표현은 일관되게 득표가 낮았고, "줄이고~늘리기", "재검토", "강화" 같은 완화된 표현이 높았다.
팀은 원문 그대로 인용하는 원칙을 지켰기에 표현을 조작하진 않았지만, 돌이켜보면 "공약지의 표제어 하나하나가 유권자 행동을 직접 바꿨다"는 사실은 콘텐츠 노동의 무게를 보여준다. 50자는 그냥 50자가 아니었다.
"공약을 소개하는 지루한 서비스를 20만 명이 넘게 쓰는 걸 보니 다들 정말 신나고 즐거웠다. 다음에는 더 잘 할 수도 있다. 게다가 경쾌한 성공의 경험을 공유하는 친구들과 함께 한다면 이번에 이루지 못한 목표를 이를 수도 있는 것이다." — 씨 (UX 기획)
11일 만에 23만 명이 왔다
런칭은 4월 4일. 4월 5일을 기점으로 곡선이 꺾였고, 트위터와 커뮤니티 카페에서 바이럴이 일었다. 마케팅 예산은 사실상 0이었다.
이용자는 누구였나
- 80.78%가 18–29세 (18세 미만 2.74%, 30대 14%, 40대 이상 5% 미만)
- 여성 76% — 인구통계 대비 뚜렷한 성별 편중. 여성 이용자의 84%가 18–29세
- '그 외' 성별 선택자가 약 2.5% (3천명) — 당시 설문으로는 이례적 수치
- 서울 32.6% (인구통계 18.8% 대비 +13.9%p 편중), 지방은 상대적으로 저조
"마케팅이 필요 없었다. 트위터, 카페 등지에서 바이럴이 퍼졌다. 10만 명, 20만 명이 우리가 만든 서비스를 썼단다. 20만 명이라니. 내 인스타그램 팔로워는 400명인데." — 은국 (디자인)
데이터가 말해준 것들
가장 많이 선택된 공약 TOP 5
| 순위 | 공약 | 정당 | 선택수 |
|---|---|---|---|
| 1 | 아동 성범죄자 처벌 강화하기 | 미래통합당 | 63,338 |
| 2 | 사이버 성범죄 처벌 강화하기 | 민중당 | 58,593 |
| 3 | 비동의 강간죄 개정, 성폭력 공소시효 폐지 | 녹색당 | 46,242 |
| 4 | 여성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도시 환경 | 더불어민주당 | 39,803 |
| 5 | 스토커 예방과 처벌을 선진국 수준으로 | 국민의당 | 36,230 |
상위 5개 중 4개가 성범죄 주제. N번방 사건이 공약쥬스 운영 기간과 정면으로 겹쳤다. 성범죄 이슈 1인당 평균 공약 선택수는 2.7개(전체 주제 중 최고).
- 편견 하나가 깨졌다 — "강한 정책은 강경한 지지자가 좋아한다"는 가설은 틀렸다. 같은 성범죄 공약도 "금지"보다 "폐지", "삭감"보다 "완화", 대상을 특정하지 않는 중립 표현이 2배 이상 득표했다.
- 정당의 우선순위 ≠ 유권자의 우선순위 — 민주당이 1순위로 올렸던 '유망 벤처기업 발굴'은 이용자 선택 15위. 반대로 민주당 5위 '여성안심 도시'가 당 전체 1위가 됐다.
- 이념·인물 기반 공약은 외면받는다 — "탈원전 폐기 국회결의안 통과", "문재인 대통령 탄핵" 같은 공약은 하위 10%.
- 생활 밀착형일수록 성별 차이가 작다 — 주거·육아·부정부패 공약은 남녀 선택 비율이 거의 1:1.
기후·환경 공약은 어땠나
새 프로젝트를 설계한다면 반드시 기억해야 할 데이터.
⚠ 기후·에너지 공약은 일관되게 하위권이었다
| 공약 | 정당 | 선택수 | 순위 |
|---|---|---|---|
| 환경과 관련한 벤처기업 키우기 | 정의당 | 1,619 | 스타트업 꼴찌 |
| 탈원전 정책 폐기·태양광 발전소 해체 | 친박신당 | 1,546 | 에너지 꼴찌 |
| 석탄발전을 친환경 발전으로 모두 대체 | 정의당 | 1,889 | 하위권 |
| 탈원전 정책 취소하고 원자력 산업 육성 | 미래통합당 | 4,231 | 하위권 |
| 화석연료 기반에너지 50% 감축 | 민생당 | 2,777 | 하위권 |
| 미세먼지 배출기업에 큰 세금 매기기 | 녹색당 | 8,990 | 녹색당 3위 |
| 미세먼지 대응 한-중-일 협력체 | 더불어민주당 | 9,579 | - |
결정적 관찰 — 정의당은 '그린뉴딜'을 당 차원 의제로 삼았지만, 2030 공약쥬스 이용자 중에서는 환경 의제 선택률이 가장 낮은 그룹에 속했다. "기후변화에 관심이 있다"는 여론조사 결과와, "공약 카드를 실제로 고를 때"의 행동이 달랐다.
왜였을까 (추정)
- 공약 표현이 추상적이었다 — "친환경 발전으로 대체"는 "학습공간 미세먼지 차단"보다 체감이 어렵다.
- 강경 표현 위주였다 — "50% 감축", "모두 대체", "해체" 등은 득표가 떨어지는 패턴 그대로.
- 주제 선정 단계에서 '기후위기' 자체가 19개 주제에 없었다 — "에너지", "미세먼지"로만 잡혔다.
→ 기후 매니페스토 플랫폼을 새로 만든다면 "체감 가능한 생활 연결 + 중립적 표현 + 구체적 이행방안"이 정답이라는 것을 공약쥬스 데이터가 이미 증명했다.
입법 모니터링, 후회, 다음
입법 모니터링 (2020.08.01 기준)
공약쥬스에서 가장 많이 선택된 성범죄 이슈 6개 공약과 관련된 법안이 21대 국회 개원 후 대부분 발의됐다. 아동·청소년 성보호에 관한 법률 개정안, 스토킹 처벌법, 성폭력처벌법, 형법(비동의 강간죄), 범죄예방기반조성법 등 수십 건. 발의 ≠ 제정이지만, 공약 → 법안 경로가 시작됐다는 증거는 남았다.
솔직한 후회
"공약쥬스를 더 많이 알리고 더 많은 유저분들을 찾아가지 못한 것이 아쉽지만, 이 아쉬움이 다음 도전에서 좋은 연료가 될 것이라 기대해봅니다." — 솜
"돈 있고 힘 있는 기관에서 해야할 일을 아홉명의 직장인이 대신했다. 고맙게 귀이 여기고 유용하게 사용해줬으면 한다." — 키
한 줄로
공약쥬스는 "읽히지 않던 공약지를 20만 명이 읽게 만든" 사건이었다. 서비스는 11일 운영되고 닫혔지만, 데이터는 남았다 — 정당 우선순위와 유권자 우선순위가 얼마나 달랐는지, 어떤 표현이 표를 잃는지, 그리고 기후 공약은 정확히 어느 지점에서 미끄러졌는지.
다음 프로젝트가 기후 매니페스토 플랫폼이라면, 공약쥬스가 남긴 세 가지를 꼭 챙겨야 한다:
- 생활 밀착 프레이밍 — "탈원전"이 아니라 "우리 동네 전기요금과 미세먼지"
- 중립적·구체적 표현 — 강한 단어일수록 표가 떨어진다
- 입법 추적의 연속성 — 공약쥬스가 2단계에서 끊긴 지점. 선거 후 모니터링이 본편이 돼야 한다